아티클세계에서 최초로 스케이트보드를 탄 사람은? <下 편>

2021-05-27



난 편에서는 스케이트보드의 유래를 다루어보았다.

스케이트보드는 1960년도에 혜성같이 나타나 큰 인기를 끌었다.

해변의 서퍼들에게서 태어나 도시의 아이들에게 전파되어 유행은 뜨거웠다.

하지만 그 유행은 혜성처럼 찰나같이 빛나고 지나가버렸다.

스케이트보드의 안전사고 문제를 미국 시민들이 예사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의 스포츠 종목으로 인정받기 위해선 스케이트보드 장비 자체의 불안 요소를 개선할 필요가 있었다. 

스케이터들은 지나간 명성을 되찾기 위해서 고민했다.



 1970년대 초, 스케이트보드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발명이 일어난다.

 프랭크 나스워디(Frank Nasworthy)의 "캐딜락 휠스(Cadillac Wheels)"가 폴리우레탄 스케이트보드 바퀴를 만든 것이다.

 이전의 철 또는 점토로 돼있던 바퀴는 주행이 불안하거나 파손되기 쉬웠다. 이를 대체할 기동성과 내구성이 탁월한 바퀴가 등장한 것이다.

 이 획기적인 발명과 함께 다시 한 번 스케이트보드는 인기를 되찾기 시작한다. 

관련 회사들은 이전의 과거를 잊지 않았는지, 1975년에는 처음으로 스케이터들을 위한 보호 장구들이 발매되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는 아직 구색을 갖춘 스케이트파크가 없었기 때문에, 스케이터들은 보드의 바퀴가 굴러가는 장소에 삼삼오오 모이곤 하였다. 

이러한 "스팟(spot)"중의 대표적인 예로 에스콘디도 저수지(Escondido reservoir)가 있으며, 이는 훗날 스케이트파크의 모티브가 된다.



 선풍적인 인기와 함께, 스케이트보드 경연 대회들이 차례로 개최된다.

 이 중 가장 큰 대회 중 하나는 델 마르(Del Mar) 전국 선수권 대회이다. 캘리포니아주의 해변 도시에서 이 대회는 이틀 동안 진행되었으며, 바인 스케이트보드와 캐딜락 휠스가 후원했다.

 이 대회에서 전설적인 스케이터 팀, 제피르 팀(The Zephyr Team)이 활약한다. 

Z-boys로 알려진 그들은 서핑을 기반으로 한 선구적인 스타일과 출중한 실력을 사람들에게 선보였다.

 사람들은 열광하였고, 스케이트보드 잡지사들은 Z-boys의 인기를 포착하여 기사를 작성하였다.

 그들은 스케이팅의 새로운 지표를 이끌고 스케이트보드 역사에 전설로 남았다.

 이들의 대중적인 성공에서 기업과 단체들은 스케이트보드의 상업적 성공 가능성과 잠재력을 보았다. 이윽고 캘리포니아 전역에서 상금과 경품을 내걸은 스케이트보드 경연 대회가 개최되기 시작했다.

 또한 이 시기에 스케이트보드 역사에 빼놓을 수 없는 버트 스케이팅(Vert Skating)의 전조가 시작된다. 

가뭄으로 말라버린 원형 수영장에서 스케이터들은 보드를 타기 시작한 것이다. 이전까지 스케이팅이 평지에서만 이루어졌다면, 이제는 수직에 가까운 경사면을 자유롭게 누비는 스케이팅이 새롭게 등장한 것이다.


버트 스케이팅은 스케이트보드의 새로운 트렌드였다.
별다른 보호장치 없이 공중을 누비는 스케이터들은 일반 시민들에게 아주 큰 볼거리였다.
 이러한 트렌드와 함께 1980년대 초반까지 200개에 육박하는 스케이트파크가 조성된다. 하지만 난이도가 높은 버트 스케이팅에 도전하지 못한 스케이터들은 길거리에 남아 스트릿 스케이팅을 발전시켰다.
 대표적인 버트 스케이터로, 앨런 겔펀드(Alan Gelfand)는 화려한 공중 기술을 선보였다. 스트릿 스케이터로는, 로드니 물렌(Rodeny Mullen)이 최초로 킥플립(kick flip)을 개발했다. 
이러한 선구적인 스케이터들의 끊임없는 열정으로 현대식 스케이팅이 점차 형태를 갖추어갔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 스케이터들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반대로 스케이트보드의 두 번째 전성기도 점차 사그라들었다.
 버트 스케이팅과 스트릿 스케이팅의 전문적이고 양분된 스타일은 일반인들이 다가가기 어려웠다. 그리고 버트 스케이팅의 높은 난이도와 위험성은 스케이트파크 건설 비용과 보험 비용을 치솟게 만들었다.
 또한 이 시기에 불거진 경제적인 불황으로 인해 많은 스케이트보드 업체들이 문을 닫고 말았다.
 또 한 번 주류 문화로 편승되지 못한 스케이트보드는 소수의 스케이터들만의 문화로 잔류하였다.



 이전까지의 스케이트보드 문화의 한계점은 극명했다. 

스케이터들의 재능과 기술을 선보일 수 있는 플랫폼이 없다는 점이었다.

스케이트보드에 관심이 많던 마케터 돈 보스틱은 이를 지각한다.  그리고 1994년 5월, 보스틱은 스케이터들에게 그러한 기회를 제공할 수 있는 월드컵 스케이트보딩(WCS)이라는 단체를 설립한다.

1995년에, 그들의 스케이팅이 스포츠 중계 채널 ESPN에서 중계되었다. 대중들은 열광하였고, 쏟아지는 환호는 스케이터들에게 분명한 동기 부여가 되었을 것이다.

이 시기에 유명 브랜드, 나이키와 아디다스는 스케이트 선수들을 위한 신발을 만들기 시작했다.

1990년대 후반까지, 스케이트보드는 주류 청소년들 사이에서 입지를 굳혔을 뿐만 아니라, 프로 스케이트 선수들은 프로 경기에서의 쇼 스톱 퍼포먼스로 그들의 인기를 되찾기 위해 재기하기 시작했다.

또한 이 시기에 전설적인 스케이터, 토니 호크(Tony Hawk)의 현란한 공중제비는 대중들에게 큰 파장을 일으켰다.

스케이트보드가 스포츠계에서 큰 인기를 얻자,  그의 이름을 걸은 비디오게임 "토니 호크의 프로 스케이터"가 출시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스케이트보드는 더 이상 소수가 즐기는 서핑의 아류가 아니었다. 이제는 어엿한 스포츠 종목으로 거듭난 것이다.



2000년대 초까지, 추정되는 스케이터의 인구는 약 840만 명이었다.

그리고 2004년도까지 미국에는 2,000개 이상의 스케이트파크가 설립되었다. 

과거의 시행착오를 거치고 대중 스포츠로 거듭난 공로를 높이 사는 차원에서,  2008년엔 스케이트보드는 미국 국내 완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토니 호크는 자신의 스케이트보드를 박물관에 기증했다. 

그리고 2009년 캘리포니아에 있는 스케이트랩(Skate Lab)은 스케이트보드 명예의 전당과 스케이트보드를 문화와 스포츠로 혁신한 사람들과 장소들을 위한 박물관을 설립했다. 

현대에 이르러서 또 다른 중요한 사건으론, 2020년 하계 도쿄 올림픽에선 스케이트보드가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다.

 비록 현 시국에 개최는 불분명하지만, 스포츠로서 스케이트보드의 위상이 굳건해졌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일임에 틀림없다.



 스케이트보드에 대한 인식이 눈에 띄게 개선된 것을 필자는 느낀다.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보드 위에 올라간 모습을 최근 들어 자주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심이 커지고 대중적으로 스케이트보드가 안착될수록, 그에 맞는 건강한 의식을 가진 문화가 더 발전해야 됨을 느낀다.

 이전의 역사를 보아도, 대중화에 있어서 오랜 시간과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겪은 것을 볼 수 있어서다. 

대한민국에서는 이전의 그릇된 문화를 답습하지 않고 성공적인 스케이트보드 대중화를 바라며 아티클을 마친다.



editor: monopatin

참조
위키피디아 <skateboarding>
칼럼 < Sidewalk Surfing: The Gnarly History of Skateboarding >
칼럼 < History of skateboarding: Notable events that took place >
기사 < RIDING CONCRETE: SKATEBOARDING IN CALIFORNIA >
모든 이미지 < google imag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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